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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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와이프를 정말 사랑해?"
 이사벨의 촉촉히 젖은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유학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던 그녀.
그녀가 오늘밤 돌연 도발해온다. 그래,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일 거야.
중얼거리는 에드워드의 눈에 갑자기 선술집(pub)에 있던 마을 사람들의 뜨악하는 모습들이 확 들어온다. 낯선 나라, 낯선 두 남자,그리고 끈적거리는 대화.
 그날 밤 스코틀랜드 아일 섬은 어지럽게 아름다웠다. 철 지난 꽃마저 다시 필 듯했다. 해변엔 고깃배들이 올망졸망 줄지어 눈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웬 놈의 눈발은 그렇게 마음을 뒤흔드는 건지.
 중국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다 영국에 공부하러 온 이사벨의 집안은 3대째 의사의 맥을 이어왔다. 할아버지는 정형외과 의사인데, 문화혁명 때 하방(下放) 당하고 병원을 뺏겼다. 아버니는 시안(西安)의대 미생물학 교수다. 그녀는 다국적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애인과 2년간 동거하다 꿈을 좇아 대륙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오늘 컨디션이 안좋아. 이미 잠이 푹 들었을거야......."
 이사벨의 눈이 이젠 숫제 광채를 내뿜는다. 엘리자베스는 태국 부호의 딸이다.
 "이사벨,저기........"
 에드워드는 숨이 탁 막혀드는 걸 느낀다.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는데도 입안엔 갈증이 가득하다. 
 "이사벨,섹스는 말이야......."
 40대 가장 에드워드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지난번 버밍엄에서 말했듯이 남녀관계는 책임질 수 있는 사람끼리 갖는 거야.  그게 우리 동양의 미덕 아니겠어?  우린 좋은 친구잖아."

 한달여 전 어느 날이었다. 이사벨은 어학 수업이 끝나자 에드워드에게 다가왔다. 여느 때와는 눈빛이 달랐다. 처연한 것 같기도 하고,외로움에 겨운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낀 에드워드는 그녀를 시티센터의 한 커피숍으로 데려 갔다. 그날 밤 이사벨은 '친구 맹약'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황을 이상하게 몰아갔다.
 이사벨과 엘리자베스,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온 나타샤. 모두 각자가 맘에 드는 영국식 이름을 골라 쓰고 있었다. 에드워드도 영국에 오기 전에 영국 왕자 이름을 택했다. 촌스럽게 영국에서까지 고국식의 이름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들 네사람은 영어 어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 그야말로 '모나미'다.
 "에드워드. 너무 힘들어. 난 애인과 함께 살다 왔잖아.그리고 나 스물여섯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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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나도 혼자 살기 너무 힘들어. 지난번 얘기했잖아.하지만 우린 잘해낼 수 있어. "
에드워드의 눈물어린 말은 그러나,스코틀랜드 아일 섬의 '이브스런' 풍경에 묻혀 그냥 건성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눈부신 자연의 신비 앞에 모두 넋을 잃었기 때문일까.
맞아. 1989년 방문한 스위스보다 더 멋있어. 너무 멋있어. 죽이는 구나. 텁텁한 맛의 흑맥주 기네스의 알코올 기운이 온 몸에 짜릿하게 번져 나갔다.
스위스도 참 죽였었지. 당시 런던과 파리를 거쳐 스위스로 갔다.런던에선 영국왕립건강협회장인 앤 공주가 전세계 언론인들에게 디너 파티를 열어주었다.자연사박물관에서의 파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파리 뒷 골목은 추억거리를 남겨 주었다.스위스로 날아 갔을 때 에드워드는 현기증을 느꼈다. 화사한 꽃과 색다른 것들에 넋을 잃었다. 뻐꾸기 시계를 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일을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쓴 웃음을 지었다.

"에드워드, 지난번 이야기했지만 난 너무 힘들어. 동거했던 애인도 마음에
안들어. 난 자유로운 새가 되고 싶어. 당신은 이런 게 싫어? 나,당신과 더
가까이하고 싶어."
헉. 숨이 차올랐다.
"나, 그냥 영국에 남을까? 에드워드는 꼭 돌아가야 돼?"
순간 선술집엔 긴 침묵이 흘렀다. 

"이사벨.안돼. 견뎌내야 해."
에드워드는 이사벨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그래,이럴 땐 둘러가야 해."
에드워드는 터키산 가죽 코드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그리고 오른쪽 호주머니에 있던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에든버러의 여행사에서 챙긴 관광 팸플렛이었다. 다행히 팸플렛엔 빈 공간이 많았다. 
"이사벨,두보 이태백 아니?"
이사벨은 알아듣지 못했다.당연하다. 그가 영어로 '두보 이태백'을 한국어 원음대로 발음했으니 말이야.
"에드워드,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지금?"
할 수 없다. 이젠 완전 필담이다.
에드워드는 10년 전 중국어를 좀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성 발음을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글로 쓸 수밖에 없었다 .
다행히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고전 담당 '촉새'님 덕분에 에드워드에겐 십여개 한문 문장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일필휘지로 두보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써갈기기 시작했다. 과거급제한 사람처럼.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산 속에 왜 사느냐고 누가 묻기에
웃고 대답 안 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숭아꽃 물에 흘러 아득히 가버리니
여기가 바로 속세를 떠난 별천지로세.)

이사벨은 역시 달랐다.  그녀도 이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그래, 중국에선 다 떨어진 치과의사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닥터 아닌가?
에드워드는 순간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음,역시...."
에드워드가 머리를 들어 이사벨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뜻밖에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에드워드 앞에서 여전히 매혹의 향기를 지어보이는 이사벨.
그녀는 치과의사로, 보건정책을 공부하러 영국에 왔다. 의대 기초의학 교수인 아버지 집에서 머물던 영국인 여자 선교사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에드워드는 최초의 여자 친구인 이탈리아의 나타샤 소개로 이사벨을 만났다. 나타샤는 몸집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원더우먼 스타일이랄까. 풍만하고 거대했다.  에드워드와 나타샤는 '담배 친구'다. 어느 날 어학원 뜰에서 쉬는 시간마다 나란히 담배를 피우다 친구가 됐다.  에드워드는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다. 그러니 말을 먼저 건넨 사람도 나타샤였다. 
에드워드,나타샤,이사벨,그리고 타이 부호(?)의 딸 엘리자베스는  거의 매일 어울려 다니는 사이가 됐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미인이다. 아빠는 공식적으로 없다. 사생아다. 하지만 아빠가 누군지는 안다.  군부의 실력자라고 했다. 단짝으로 지내온 이사벨의 말에 따르면. 그 군부 실력자는 힘을 이용해 엘리자베스의 엄마를 중견기업가로 키웠다. 식품업체를 여러곳 거느리게 했다.
 네 사람은 서로 나이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나이를 묻지 않는 게 서양의 에티켓 아닌가. 그래,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르자.
"너희들은 내 나이를 결코 맞출 수 없을거야. 후후후."
그랬다. 그들은 에드워드의 나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네 사람은 동갑내기 처럼 친밀감을 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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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우리 집 같이 갈래?"
보름 전  네사람은 시티센터(도심,미국의 다운타운) 의 한 중국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의논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 때 나타샤가 야무진 얼굴로 세 친구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바로 로마행 여행을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나타샤. 너희 집에? 우리가 묵을 방이 있니?"
"그래, 방이 두개 남아 있어. 엄마도 너희들을 데려 오래.로마엔 너희들이 볼 게 참 많아."
그들은 즉시 의기투합했다. 다음날 여권과 은행 통장 등을 챙겨 출입국사무소 버밍엄지소로 찾아갔다. 직원은 친철하게 서식 작성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결국 로마행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제길헐."
나타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에드워드의 경우엔 O.K라고 했다. 그런데 타이의 엘리자베스와 중국의 이사벨이 문제였다. 통장잔고가 규정에 못미쳐 이탈리아 로마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할 수 없지. 나타샤를 보낼 수밖에."
에드워드는 서운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였다.
"에드워드!"
이사벨의 눈이 돌연 반짝거렸다.
"뭐-?"
"엘리자베스와 너,그리고 나 셋이 함께 스코틀랜드로 떠나자. 어때?"

에드워드는 꼭두새벽부터 바지런을 떨었다.
"두 여자의 정절을 꼭 잘 지켜야 해. 그런데 정절이라는 말뜻이...."
스코틀랜드에서 강도나 성도착자를 만났을 땐 어떻게 할까.  맞아. 칼로 중무장을 해야지. 그는 등산용 칼을 허리에 찼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을 것 같았다. 바지 안주머니에 스위스 칼을 하나 더 넣었다.
 "그런데, 그 놈들이 여러 명이면 어떻게 하나.이사벨과 엘리자베스는 겁에 질려 벌벌 떨텐데... ?"
얼마전 버밍엄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남편을 따라 연수 온 여자가 돈,가방,금반지,목걸이를 몽땅 뺏기고 몹쓸 짓까지 당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제길헐. 무슨 뾰쪽한 방법이 없을까?
룸에서 나와 응접실까지 왔다갔다 하며 천장에 담배 연기를 뿜어대던 그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등산용 칼을 챙겼는데,등산용 스틱까지 준비하면 되잖아. "
스코틀랜드 여행은 1주일 패키지로 예약돼 있었다. 에든버러까지 버스로 달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문  뒤, 사막처럼 황량한 하이랜드를 거쳐 아일섬으로 갔다 에든버러를 거쳐 돌아오는 코스였다. 하이랜드라면 좀 황당한 영화에 많이 나오는 곳이 아니던가.
'에든버러에는 흑인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지. 음....'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에선 흑인을 정말 보기 힘들다고 했다. 황인종도 일본인,한국인,대만 사람,그리고 홍콩 사람 정도가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버밍엄에서 대낮에 흑인 5명에게 노상강도를 당한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던 에드워드에게선 '흑인=불량배'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욕해도 할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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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