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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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여시(如矢). 정말이지 쏜살 같다. 나이 탓인가. 종전엔 여간해선 못느꼈던 걸 요즘엔 느낀다. 시시때때로 목이 마르다. 마시고,또 마셔도 갈증은 나를 풀어주지 않는다. 고독을 씹는다더니,반대로 고독이 나를 씹는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나 보다. 최근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13일 대학의 홈커밍 행사가 열렸다. 가끔씩 모임에서 보는 얼굴이 대부분이지만, 그 날 학과 동기들의 모습은 웬지 달라보였다. 나이테를 공식확인한 자리였기 때문인 것 같다. 모두들 중얼거렸을 게다. "많이 늙었구나." 


그 시절,대강당에서 진행되는 채플 시간에 우린 '가짜(家字) 대학생'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우린  '연세/상(商)'자를 새긴 배지를 달았고,그녀들은 '연세/가(家)'자  배지를 달고 다녔다. 당시의 가정대학은 요즘 생활과학대학으로 바뀌었다. 상경대학과 가정대학은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렸다.  참 다행이었다. 함께 입학했던 중국 화교 여학생은 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바람에 입학정원이 160명에 달하던 우리 경영학과엔 여자의 씨가 말랐다.  입가에 작은 점이 있던 그녀는 예뻤다.  출결 점검이 매우 엄격해 '연세 고등학교'라고 일컫던 경영학과 커리큘럼을 따라가지 못했을까. 특례입학했던 그녀는 돌연 자퇴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린, 대학당국이 여학생만 있는 가정대학을 상경대학과 묶어준 걸 감사하게 생각하곤 했다.
  
"문과대학에는 여학생들이 많았었지. 그런데, 자칫 잘못 했다간 맞아죽을까봐 접근하지 못했었지."  대학 배지가 새겨진 베레모를 받아 쓴 동기들의 이런저런 회상이 이어진다. 

"교양학부 식당은 좀 비쌌지. 음식은 고급스러웠지만 말이야."
"상경대학 건물은 교육과학대학 건물로 바뀌었대. "
"경영학과가 경영대학으로 독립하려고 했을 때, 경제학과와 응용통계학과의 반대가 무척 심했대. 돈 되는 학과가  빠져나가려고 하니 그럴수밖에 없지."
"결국 독립한 경영대학은 문과대학 뒷쪽에 자리잡았다는데..." 

단과대학 기(旗)를 든 학군단 소속 학생들의 뒤를 따라 우린 행진했다. 강당에서 백양로로,언더우드 동상이 있는 문과대학 앞뜰로... 그러나 축제 기간 중에 있는 후배들은 우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치 우리가 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어느덧 행진대열은 백주년기념관에 도착해 있었다. 우린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앗, 그 때였다. 낮익은 여자 몇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난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그녀를 불렀다.
"xxx씨!"

그녀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명찰을 본 뒤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에 응했다. 하지만 옛날과 달리 활달했다. 그래,나이가 몇 살인데...

가정대학 출신의 그녀는 같은 동아리(클럽)에서 활동했던 내 동기들을 많이 알고 있는 듯했다. 계를 묻어 평소에도 자주 만나는 동기에게 물었다. 그녀는 졸업 후 외국계 은행에서 일했고, 그 때 거래 관계로 알고 지낸 사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명단을 찾아보니,서초동에서 살고 있었다. 직위란은 비어있지만,직장이 명기된 걸로 보아 그녀는 아직도 사회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동기들과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우선,남학생이 전무한 가정대학 학생들이 상경대학 학생들과 미팅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  대학 시절에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는 오대산 등산의 파트너였고, 여러 모로 친했던 동기(사업가)와 나의 첫 미팅 파트너가 동일 인물이었다!

"그러니까,우리 둘 다 그녀에게 결국 차인 셈인가?"
우린 키득대며 웃었다. 그녀는 지방대학의 교수다.

스스로 당긴 운명의 화살에 따라 난 삶을 꾸려 왔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쏜살에 얹혀 살아온 인생!  하지만 날아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정신 없다. 마누하님과 나에겐,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하는 순간이 있다. 좀 쑥스럽지만  그건 TV 시청 시간이다. KBS1의 대하 드라마 '서울 1945' 를 매주말 함께 즐긴다. 오래 전 소설 '태백산맥' 매 권을 가슴 졸이며 함께 즐겼던 것처럼. 끝날 때마다 아쉬워 한 마디 한다. 

"에이~ 짜식들 좀 길게 하지." 
그럴 때마다 마누하님의 말씀은 한결 같다. "여보, 일 주일 금~방 간다!"
정말이다. 금방 간다. 아찔하다. 아무래도 올해는 이 드라마와 함께 세월 가는 걸 체감하고 살 팔자인가 보다. 세월은 여시(如矢)다. 여시(여우) 같은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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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