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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13 디지털 권력과 조선시대 사림파
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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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행복한 책읽기 커버스토리는 '디지털 권력'이라는 테마를 다뤘다. 경영학 박사 서진형씨가 쓴 글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그누구도 교황의 권력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의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을지라도 세계와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술을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된다."
그는 피터 드러커의 『Next Society』, 케빈 켈리의 『디지털 경제를 지배하는 10가지 법칙』을 소재로 삼아 '디지털 권력'을 나름대로 해부한다.
사진 설명은 그 해부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 지 잘 보여준다. 시각적 효과를 최대한 발휘했다. 그는 사진설명을 통해 촛불 시위에 참가한 20대 등 젊은층이  총선에서도 강력한 변수로 떠올랐으며, 그들은 인터넷 공간을 장악한 데 이어 휴대전화로 ‘무장’하고 효율적인 연대를 빠르고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고 분석한다.

 

디지털 세대,디지털 권력.  

이 새로운 권력은 정보혁명으로 생긴 디지털 공간을 바탕으로 그들의 힘을 키워왔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이를 읽는 데 실패했다. 특히 보수세력은 그들이 지켜온 영지의 한 귀퉁이가 처절히 탈취당하는 수모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2차원적 공간에 너무 깊숙히 빠져 있지 않았을까.


디지털 세대,디지털 권력.

그들이 장악한 공간을 주시하면서 조선시대를 잠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뒤 조선에선 왕권과 신권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훈구세력과 신흥세력의 권력 장악 싸움도 간단이 없었다. 예종 때 발생한 남이 장군의 옥사는 신숙주와 한명회 등 세조 때 공을 세운 훈구세력과,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남이 강순 정숭로 등 신흥 무인세력 사이의 알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 끼여든 사람이 바로 예종이다. 그는 즉위 직후 '분경(명문세가를 상대로 한 인사청탁)금지법'을 발동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게 된다. 남이(세조의 외손자) 등 신흥 무인세력이 예종과 함께 자신들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겨누자 훈구세력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훈구세력은 그 유명한,'백두산석 마도무...."로 시작되는 남이 장군의 시를 역심의 표현으로 몰아 신흥 무인세력을 모두 숙청한다. 그리고 이후 정계를 떠나 있던 한명회가 영의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들 훈구세력을 역사는 '훈구파'로 부른다.

그러나 그들만의 세상인가.

지방을 무대로 이른바 '사림파'가 등장한다.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거치며 정치의 변두리로 내몰린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을 만든다.그것이 바로 서원과 향약이다. 사림파는 이를 통해 성리학을 보급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들 두가지를 그들의 정략적 입지를 강화하는 무기로 활용한다. 풀뿌리를 장악한 셈이다.

이후 사림파는 서원을 붕당정치의 중심으로 키웠고,전국 각지엔 서원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시대도 다르고,상황도 다르다.

때문에 어떤 별개의 것을 비교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최근의 디지털 권력을 '사림파'로,총선에서 패배한 보수집단(기득권층)을 '훈구파'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일리가 있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공간'은 조선시대의 '서원과 향약 '에 견줄 수도 있겠다.


행복한 책읽기에서 서박사는 디지털 권력이 ‘다원적 중심’을 창출하는 게 과제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말한다. 디지털 권력은 서원의 훗날 병폐를 만들어선 안된다.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리며 '병소'가 돼버린 전국의 서원 1천여 개 가운데 대부분이 흥선대원군의 철퇴에 맞지 않았던가.

역사는 결코 '독불장군'을 용납치 않는다. 새 권력,디지털 권력은 '다원적 중심'을 새롭게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사림파의 거두 김굉필의 제자로,중종 때 개혁정치를 펴다 '역사적 죽음'을 맞은 조광조의 사례를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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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