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방하착'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8.02 나에겐 아이패드가 있다_난 폼생폼사가 좋다
  2. 2010.03.13 다비는 무소유의 극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내실과 자신감이 있으면 허풍을 내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 선무당이 사람 잡고, 썩 부자도 아닌 '강남 졸부'가 온갖 폼을 다 잡는다. 이런 게 세상사의 한 단면인가 보다. 그리고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속물 말이다. 
 
지난해 1년 동안 회사를 휴직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행복감에 온몸을 부르르 떤 적이 적지 않다. 회사 덕분에 호강 한 번 크게 한 셈이다.  하지만 팽팽 논 건 아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참 많이 공부하고,책을 끼고 살았다. 학생들의 진로에 도움을 주기 위해 틈만 나면 머리를 쥐어짰다. 결과는 아직 잘 모르겠다. 올 가을 취업시즌이 지나야 알 것 같다. 



NIKON | E7900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12sec | F/2.8 | -0.70 EV | 7.8mm | ISO-50 | Off Compulsory | 0000:00:00 00:00:00





 


4c0521483d72c.jpg




또한 벼르고 별렸으나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 배우지 못했던 색소폰에 드디어 입문했다. 요즘엔 또다른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색소폰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1학기를 끝낸 다음엔 웹 디자인과 웹 프로그래밍(마스터) 과정을 한 바퀴 돌았다.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인터넷 강의도 들었다. 웹 프로그래밍 과정을 하면서, 내가 '문과 출신의 50대 할배'라는 엄연한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 코딩하다가 머리가 정지되는 순간을 여러 차례 맞았다.

그리고 또 하나. 야간 불교대학을 수료하고 수계(受戒)했다. 금강경을 두 번 째 베껴쓰다가 바보가 되기도 했다. 세상이 발 아래로 아득하게 보였다. 그러다간 사회에서 왕따 당하고,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에 복귀한 뒤로는 말짱 도루묵이다. 아직도 회사 생활에 큰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다시 적응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여전히 방하착(放下着)이 잘 되지 않는다. 이젠 내려 놓을 때도 됐는데. 마침내 지난 6월 초, 또 하나의 '소유'에 목을 맸다. 미국에 유학 중인 학생에게서 아이패드를 공수 받았다. 관세를 30달러 물었다. 출퇴근 때 아이패드와 함께 논다. 아이패드를 손에 넣은 뒤부터 특히 '빈 수레의 삶'을 살고 있다. 소리가 요란하고, 폼생폼사의 과장이 심하다. 그걸 뼛속까지 느낀다. 하지만 "그냥 기분 좋게 살아가면 그만!"이라며 무시하곤 한다. 아이패드가 아직 국내에 1,000여 대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니, 아이패드의 '소유'자체가 행복이다.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는 놈이라 그럴 게다.  
 
스마트폰을 지급받은 지 얼마 안됐을 때의 일이다. 삼성 캠코더를 가방에 넣고, 혼자 야외촬영을 나갔다. 전철을 바꿔 탔는데, 노약자 석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저씨, 여기 앉으세요"라고 권했다. 그 여자분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아무래도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많게는 서너 살은 족히. 순간 부아가 치밀어 놀랐다. 머리 염색을 좀 하지 않았기로서니, 내가 60에 가깝게 보인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 제가 훨씬 더 어리거든요."
그 분의 친철을 퉁명스럽게 뿌리치고 말았다. 그 분은 기어들어가는 모기만한 소리로 "아저씨,저도 많이 어리거든요..." 라면서 무안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암만해도 내가 아직 젊다는 점을 확인시켜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순간, 스마트폰을 꺼내 별의별 프로그램을 다 손대고 마침내 캠코더를 꺼내 닦는 등 유치한 짓은 다했다. 눈에 힘도 주고, 젊은 척 했더니 그 여자분은 '머리만 희였지 나이가 어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ㅋㅋ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아이패드가 미국에서 공수돼 내 손아귀에 들어온 날이었다. 마누하님에게 그 '지하철의 코미디'를 이야기하면서 "앞으론, 그런 경우가 생기면 아이패드로 기를 죽여야 겠다"고 말했다. 마누하님의 쓸쓸함이 밴 웃음이 눈 앞에 어린다. 요즘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얼리 어댑터로 '잘 난 체 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전혀 없으니, 대놓고 욕 먹을 일은 없다. 며칠 전에는 60세 안팎으로 보이는 노인이 귀에 아이팟을 꽂고 음악을 듣다가 중단하고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거 뭐에 쓰는 물건인가요?"
"아이패드인데요."
"아이패드가 뭐다요?"
"뭐, 작은 컴퓨터죠. 넷북과 비슷한데, 태블릿pc라고도 한답니다."
"아! 넷북 사촌이군요."
할배가 주제넘게 그런 걸 다 묻나 싶었는데, 그 분 넷북도 알고 깬 분이었다.
터치감이 얼마나 훌륭한지 잠시 시범한 뒤 "아이패드는 나이가 든 분일수록 더 필요한 것 같다"며 올 가을에 국내 시판되면 70만 여 원 주고 하나 살 것을 권했다. 그 할배의 말씀.
"아,정말 나도 하나 사야겠군요."
이런 소소한 재미로 요즘 난 숨쉬고 있다. 아직 방하착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편집]cDSCN0915.JPG

 
아이패드가 일본 열도에 상륙하던 지난달 28일, 드디어 미국에서 'wi-fi 전용 아이패드'(32G)가 날아서 내 손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선 가을쯤 시판될 것으로 보이니 희소성이 주는 기쁨은 더할 나위없이 크다고 하겠다. 약 1,000명이 아이패드를 쓰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얼리 어댑터가 된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21년 전, IBM이 산더미만한 IBM 5550을 과학기술 담당 기자들에게 빌려주었을 때는 기껏해야 워드 프로세서를 쓰면서 어깨에 힘을 줬다. 그 뒤 정보통신부가 생기기 전에 체신부와 한국통신,데이터통신 등을 출입했다.
 
이에 앞서 연합통신(연합뉴스의 전신) 에 근무할 땐 반도체,컴퓨터,통신업체와 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소를 맡는 바람에 머리에 쥐가 났었다. 아는 게 없어 끙끙댔다. 그러다1988년 5월 중앙일보로 옮겨 건강의학 담당을 거쳐 환경,정보통신 담당으로 일했다. 하지만 1991년 봄,사회부로 옮기면서 과학기술 및 정보통신 분야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이런 분야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4년 봄이다. 조인스닷컴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후배기자들의 참여를 독려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인터넷 강호와 바다를 떠돌다가, 2007년 봄에 행정국장 겸 웹 2.0TFT 팀장으로 일하게 됐다.  중앙일보 자회사에서 파견나온 팀원들을 현장지휘하며 함께 만든 게 워크홀릭 닷컴(http://www.walkholic.com) 과 '열린백과' 오픈토리 닷컴(http://www.opentory.com) 이다. 지난해 회사의 배려로 휴직하고 고려대 언론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웹 프로그래머 과정과 웹 디자이너 과정을 컴퓨터학원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니, 이젠 각종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접하는 게 썩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이번에 아이패드를 다루면서도 그걸 실감했다. 블로그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웹2.0 서비스 개발현장을 지휘하고, 블로그나 카페를 여럿 운영한 경험이 경영학도였던 나를 '기계치(痴)'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어쨌든 아이패드로 다시 얼리 어댑터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무한한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cDSCN0916.JPG
 
아이패드를 손아귀에 거머쥐자, 정보지원실 근무자에게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그리고 아이팟을 사용한 덕분에 낮설지 않은 아이튠스에서 계정을 만들었다. 국내 신용카드(마스터카드)로 등록했다. 또 미국에서 등록한 것처럼 우회하는 편법을 검색으로 발견해 시도해 봤으나, 며칠 사이 그 방법이 블로킹됐음을 알았다. 신용카드를 none으로 하고 기프트 카드를 써서 성공한 사람들의 가이드는 물거품이 됐다. 하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적용하는 이른바 탈옥을 할까 한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순정본을 따르기로 최종 결심했다. 탈옥 프로그램을 활용할 경우, 편리하긴 하나 바이러스 감염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결심한 이상,댓가를 치러야 한다. 미국 앱스토어에서 앱(어플,apps)을 마음대로 살 수 없다. 또한 한글 키보드 앱을 별도로 구입해야 한다.    
 
cDSCN0917.JPG
 
아이패드의 기본 화면은 위와 같이 매우 심플하다. 우선, 2.99달러를 신용카드로 지불하고 한글/영문 키보드 앱을 샀다. 하지만 매우 불편하다. 이걸 쓸 때마다 탈옥의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메모장에서 한글로 글을 쓴 뒤 복사해 붙여넣기를 해야 한다. 트위터에서 했더니 비교적 잘 붙었다. 주말엔, 가죽 케이스와 화면보호 필름 등이 패키지로 묶여 있는 제품을 주문했다. 2만 8천 원대로 비교적 싼 것이다. 필름을 붙이고 가죽 케이스로 쌌더니 멋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cDSCN0918.JPG
 

cDSCN0919.JPG



미국에서 공수된 아이패드는 30달러의 관세를 물고 들어왔다. 모두 합쳐 약 76만 원 들었다. 거기에다 케이스를 별도로 구매했으니 꽤 큰 돈을 지른 셈이다. 지름신 강림! 아이패드가 마음에 쏙 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놀라운 터치 감(感)이다. 한마디로 '죽인다'. 버벅거리는 옴니아2  같은 제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삼성전자도 많이 분발해 이와 비슷한 성능의 제품을 속히 만들었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엄청난 애플리케이션을 강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무료(free) 어플도 쓸만한 것들이 참 많다.    




cDSCN0920.JPG
 
cDSCN0921.JPG
 
아이패드의 기본기를 갖추자, 얼마전부터 신경쓰기 시작한 트위터와 내 조인스 블로그를 북마크에 즉각 추가했다. 하지만 탈옥하지 않는다면, 한글 키보드 문제 때문에 귀찮아서 트위팅이나 블로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 조블에 글을 써보려 했더니 선택(select),복사(copy),붙여넣기(paste) 기능이 불구다. 이제,하나 둘 아이패드의 기능을 익히고 콘텐트를 소비하면서 불편함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면 탈옥을 감행할지도 모르겠다. 

cDSCN0922.JPG


내 인생의 전환기를 만들어준 조인스 블로그. 아이패드를 손으로 만지면서 화면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참 좋다. 특히 3차원 그래픽이나 동영상의 기능은 최상의 선물이다. 블로그를 막 시작할 때 스캐너를 샀고, 디카도 있고,삼성 캠코더도 장만해 촬영과 편집을 연습하고 있고, 웹캠으로 1인 방송국도 실험해 보았고, 쓸만한 이미지 및 동영상 응용 프로그램을 여러 개 발견해 잘 쓰고 있고, 다양한 2.0 블로그와 카페를 시험운영하고 있다. 또 버벅거리긴 하나 스마트폰인 옴니아2 내부를 샅샅이 들여다보며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아이패드가 손에 들어왔다. 어차피 지름신을 모시기 시작했으니, DSLR카메라에도 곧 지를 계획이다. 포토스쿨에도 나가고, 캠코더와 DSLR카메라 동호회 활동도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걷기나 등산에도 관심을 쏟고 싶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손에 익으면 지난해 잠깐 배우다 잠정 중단한 색소폰 배우기도 재개할까 한다. 내 목표인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에 한 걸음 한 걸음 차근히 다가서고 있다.      

Posted by A&Z
이슈2010.03.13 16:24

스님들의 다비(茶毘)는 무소유의 극치다. 법정스님의 다비와 관련한 유언은 말할 나위 없다. 사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으니, 현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시겠다는 마지막 결단이다. 다비(화장,火葬)로 남은 뼈를 부숴(쇄골,碎骨해) 자연 속에 뿌리면(산골,散骨하면)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했다고 할 일이다. 산골한 곳을 알리지 않겠다는 것 또한 무소유의 뜻에 딱 들어맞는 조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죽음을 두려워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뭔가 남기고 떠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맞이하는데도 끝까지 무덤이나 분골함을 챙기는 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윤회의 사슬(生과 死의 결박)을 끊지 못하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승의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가는 게 마땅하다. 분골을 이름모를 나무와 꽃에 자양분으로 주고 떠나야 비로소 무소유를 실천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법정스님은 평소 가르쳤던 '무소유'를 완성하고 떠나신 셈이다. 
 
수행하는 스님을 일컬어 운수납자(雲水納子)라고 한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며 스승을 찾아, 선지식을 참구함을 이른다. 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三人行 必有我師)고 한다. 그래서 고행하는 스님들에겐 매일 아침 양치질할 절이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법정스님이 입적했다. 고인은 생전에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셨고, 중생에게 이를 권장하셨다. 하지만 무소유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허명을 얻었고, 인지세를 받았고, 오두막집과 자연 그리고 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내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소유를 나름대로 완성했다. 고인은 "장례식을 하지 마라.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장례준비위원회는 마지막 가는 법정스님의 유지를 반 쪽만 받들기로 했다. 굳이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치렀다. 유언을 존중하는 게 살아 남은 자들의 예의일 텐데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옛적에 법정스님의 수상집 ' 버리고 떠나기'(1993년 초판 발행)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 당시 나의 상념은 "무소유의 삶을 산다면서 왜 강원도 오두막집과 자연, 그리고 책에 그리 집착할까"라는 데 머물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비쳤다. 때문에 속진(俗塵)을 떠난 운수납자(雲水納子)도 완전히 방하착(放下着)하기는 불가능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무릇 수행자라 하면,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법이거늘 한 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도 의문이었다. 아침 신문을 보면서야 비로소 고인이 '무소유'의 단계에 들어 섰음을 알았다. 고인이 누리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영예와 같은 것은 사실 '삶의 때'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잡것들을 모두 떨치고 법랍 55세로 입적하셨으니, 진정으로 숙연하게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겠다. 그 분이 풀어놓고 가신 마지막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은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  법정스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문득 성철스님의 열반송이 떠오른다.



 
sungchul.jpg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라

둥근 수레바퀴 붉은 해를 토하며 산에 걸렸네.

 

生 年 欺 誑 男 女 群

彌 天 罪 業 過 須 彌

活 陷 阿 鼻 恨 萬 端

一 輪 吐 紅 掛 碧 山





 

법정스님은 결국 '생과 사의 결박'을 끊지 못하고 떠나신 것 같다. 고인도 그 점을 아신 모양이다.  "~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 다시 말해 두 번 다시 속세에 태어나지 않는 게 열반이다. 비록 부처님처럼 열반에 들지는 못하셨지만, 부디 다음 생에서는 현생의 고통을 받지 않고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시길 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법정스님이 가시는 것을 보고,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시는 원공스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6년 동안 면벽수행하신 분이다. 천축사 무문관은 계룡산 갑사 대자암 조실이신 정영스님이 만든 참선 도량이다. 1966~1971년과 1972~1977년 두 차례의 면벽수행을 끝으로 사라졌다. 6년 간 작은 구멍을 통해 소량의 공양과 배설문 정도만 들어오고 나갈 뿐인, 무문관에 스스로 갇혀 참선에 매진한 스님들은 썩 많지 않다. 직지사 조실을 지내셨고 2004년 입적한 관응스님, 범어사 주지를 다섯 차례나 지냈고 1989년 입적한 지효스님이 무문관 6년 수행을 하신 분들이다. 제선스님(선사)은 무문관 수행 후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자취를 알 수 있는 생존인물은 구암스님(하남 광덕사 주지),그리고  천축사 주석을 지내셨고 무문관을 나오신 뒤 30년 간 '걷기 수행'을 하신  원공스님 밖에 없다.  <아래 사진>  
 

wongong.jpg

 
오늘 오후, 사무치게 그리운 원공스님과 쉽지 않게 통화했다. 원공스님은 평생 옷 두 벌로 사신 분이다. 그야말로 '무소유'의 상징이다. 고행을 하시는 많은 스님들도 세속적 기준에 따르면 '무소유'를 실천하신다. 하지만 원공스님 같은 경지에 이른 분은 썩 많지 않다. 스님은 수녀님들과도 곧잘 농을 주고 받으시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로 즐겁게 해주신다. 어려운 불경 이야기는 거의 하시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양치질할 사찰도 없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다. 이 땅의 모든 자연이 스님의 품 속에 안기고, 스님이 자연의 품에 안긴다. '무소유'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원공스님이 사뭇 그리운 까닭이다.  떠나신 법정스님도 원공스님을 익히 아셨을 터다. 원공스님처럼,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6년이나 면벽수행을 한 데 이어, 30년 간 우리 강산을 떠돌며 걷기로 행공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법정스님의 입적이 많을 것을 생각케 한 며칠이었다.    
  


  



Posted by A&Z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