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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다비(茶毘)는 무소유의 극치다. 법정스님의 다비와 관련한 유언은 말할 나위 없다. 사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으니, 현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시겠다는 마지막 결단이다. 다비(화장,火葬)로 남은 뼈를 부숴(쇄골,碎骨해) 자연 속에 뿌리면(산골,散骨하면)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했다고 할 일이다. 산골한 곳을 알리지 않겠다는 것 또한 무소유의 뜻에 딱 들어맞는 조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죽음을 두려워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뭔가 남기고 떠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맞이하는데도 끝까지 무덤이나 분골함을 챙기는 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윤회의 사슬(生과 死의 결박)을 끊지 못하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승의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가는 게 마땅하다. 분골을 이름모를 나무와 꽃에 자양분으로 주고 떠나야 비로소 무소유를 실천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법정스님은 평소 가르쳤던 '무소유'를 완성하고 떠나신 셈이다.
수행하는 스님을 일컬어 운수납자(雲水納子)라고 한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며 스승을 찾아, 선지식을 참구함을 이른다. 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三人行 必有我師)고 한다. 그래서 고행하는 스님들에겐 매일 아침 양치질할 절이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법정스님이 입적했다. 고인은 생전에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셨고, 중생에게 이를 권장하셨다. 하지만 무소유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허명을 얻었고, 인지세를 받았고, 오두막집과 자연 그리고 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내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소유를 나름대로 완성했다. 고인은 "장례식을 하지 마라.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장례준비위원회는 마지막 가는 법정스님의 유지를 반 쪽만 받들기로 했다. 굳이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치렀다. 유언을 존중하는 게 살아 남은 자들의 예의일 텐데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옛적에 법정스님의 수상집 ' 버리고 떠나기'(1993년 초판 발행)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 당시 나의 상념은 "무소유의 삶을 산다면서 왜 강원도 오두막집과 자연, 그리고 책에 그리 집착할까"라는 데 머물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비쳤다. 때문에 속진(俗塵)을 떠난 운수납자(雲水納子)도 완전히 방하착(放下着)하기는 불가능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무릇 수행자라 하면,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법이거늘 한 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도 의문이었다. 아침 신문을 보면서야 비로소 고인이 '무소유'의 단계에 들어 섰음을 알았다. 고인이 누리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영예와 같은 것은 사실 '삶의 때'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잡것들을 모두 떨치고 법랍 55세로 입적하셨으니, 진정으로 숙연하게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겠다. 그 분이 풀어놓고 가신 마지막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은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 법정스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문득 성철스님의 열반송이 떠오른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라
둥근 수레바퀴 붉은 해를 토하며 산에 걸렸네.
生 年 欺 誑 男 女 群
彌 天 罪 業 過 須 彌
活 陷 阿 鼻 恨 萬 端
一 輪 吐 紅 掛 碧 山
법정스님은 결국 '생과 사의 결박'을 끊지 못하고 떠나신 것 같다. 고인도 그 점을 아신 모양이다. "~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 다시 말해 두 번 다시 속세에 태어나지 않는 게 열반이다. 비록 부처님처럼 열반에 들지는 못하셨지만, 부디 다음 생에서는 현생의 고통을 받지 않고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시길 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법정스님이 가시는 것을 보고,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시는 원공스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6년 동안 면벽수행하신 분이다. 천축사 무문관은 계룡산 갑사 대자암 조실이신 정영스님이 만든 참선 도량이다. 1966~1971년과 1972~1977년 두 차례의 면벽수행을 끝으로 사라졌다. 6년 간 작은 구멍을 통해 소량의 공양과 배설문 정도만 들어오고 나갈 뿐인, 무문관에 스스로 갇혀 참선에 매진한 스님들은 썩 많지 않다. 직지사 조실을 지내셨고 2004년 입적한 관응스님, 범어사 주지를 다섯 차례나 지냈고 1989년 입적한 지효스님이 무문관 6년 수행을 하신 분들이다. 제선스님(선사)은 무문관 수행 후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자취를 알 수 있는 생존인물은 구암스님(하남 광덕사 주지),그리고 천축사 주석을 지내셨고 무문관을 나오신 뒤 30년 간 '걷기 수행'을 하신 원공스님 밖에 없다.
오늘 오후, 사무치게 그리운 원공스님과 쉽지 않게 통화했다. 원공스님은 평생 옷 두 벌로 사신 분이다. 그야말로 '무소유'의 상징이다. 고행을 하시는 많은 스님들도 세속적 기준에 따르면 '무소유'를 실천하신다. 하지만 원공스님 같은 경지에 이른 분은 썩 많지 않다. 스님은 수녀님들과도 곧잘 농을 주고 받으시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로 즐겁게 해주신다. 어려운 불경 이야기는 거의 하시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양치질할 사찰도 없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다. 이 땅의 모든 자연이 스님의 품 속에 안기고, 스님이 자연의 품에 안긴다. '무소유'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원공스님이 사뭇 그리운 까닭이다. 떠나신 법정스님도 원공스님을 익히 아셨을 터다. 원공스님처럼,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6년이나 면벽수행을 한 데 이어, 30년 간 우리 강산을 떠돌며 걷기로 행공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법정스님의 입적이 많을 것을 생각케 한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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