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강홍규씨가 쓴 '문학동네 술동네'란 책을 우연히 마주친 건 20년 전의 일이다. 여자 선배가 술을 좋아하고 겉멋만 잔뜩 든 나에게 그 책을 선물로 줬다. 우선 제목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틈틈이 그 책을 읽으면서, 군사독재 시절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천상병 시인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 분의 미망인이 운영하는 인사동의 찻집 '귀천'을 찾아 목구멍에서 속진(俗塵)을 씻어내곤 했다. 당시 도반이었던 李모 선배는 몇 년 전 술기운을 동무삼아 먼 길을 훌훌 떠났다. 또다른 李모 선배는 회사 밖에서 문학평론가로 제2의 삶을 꾸리고 있다. 그리고 또또 다른 李모 선배는 올해 초 야인(野人)이 됐다. 1990년대 초반,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인사동 뒷골목을 쓸고 다니면서 이름 모를 '문학동네'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때문에 우연한 기회에 맞닥뜨린 'YES24 블로그축제' 블로그에서 예시된 출판사 '문학동네'의 책이 집에 상당히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도 몇 차례의 이사 때마다 손을 부르르 떨며 책을 물갈이 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설프게 짐작할 뿐이다. 외환위기 전만해도 '매일 매일 취권(醉拳)하고 산다'고 말할 정도로 술자리가 잦았던 업종에서 일했던 만큼,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읽을 처지는 못됐다. 장서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먹물이 폭포수의 물방울만큼이나마 튕기는 업종에서 내가 일하고,마누하님이 중학교 국어교사인지라 집 서가에 약간의 책은 꽂혀 있다. 거실을 비롯해 네 곳에 '일관성없는 책들'이 삐죽히 고개를 쳐들고 있다.
어쨌든, 이번 축제를 안내하는 블로그에 늘어져 있는 '문학동네'의 책 리스트를 훑어보니, 이미 재활용됐을 옛 책들의 맑은 영혼이 오랫동안 잊었던 기억의 끈을 슬그머니 내미는 듯하다. 술을 함께 즐기던 선배들이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났듯, 곰팡이가 슨 서우(書友)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서가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문학동네' 책은 람세스 5권, 나폴레옹 5권, 그리고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 1권 밖에 없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겠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책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일보에서 영화를 담당하다,지금은 밖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동진씨의 책이다. '마음의 양식'이니 뭐니 책에 관한 온갖 달콤한 말(감언), 색다른 말(이설)이 세상에 널려 있다. 책은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책은 사람을 교양인으로 키워준다. 책은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책은 마음을 살찌게 한다. 그리고...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문학동네,1판 4쇄/2001년 1월 6일,255쪽,값 7,000원)는 책에 관한 온갖 감언이설과는 사뭇 다른 영향을 내게 미쳤다. 항상 술값이 모자라 허덕이는 내 호주머니를 털어간 강도 같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마음이 동(動)해 영화와 관련된 책을 수 십만 원 어치나 사게 됐다. 속물에게 이처럼 강렬한 포스를 내뿜는 것은 그다지 흔치 않다.
"박정희는 밀실에서 부하에게 두 발의 총을 맞고 죽고,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파상풍으로 죽고, 석가모니는 사카라라는 돼지고기 요리를 잘못 먹어 심한 위경련으로 죽고, 전태일은 노동 해방을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고, 모파상은 매독으로 죽고, 푸코는 에이즈에 걸려 죽고, 생텍쥐베리는 비행기를 몰다 사막에 떨어져 죽고,알프레도(시네마 천국)는 키스 장면 필름만을 토토에게 남기고 죽고, 나오코(노르웨이의 숲)는 유서 하나 없이 목매달아 죽고, 세네카는 동맥을 끊어 죽고, 아르키메데스는 모래바닥에 도형을 그리다 적병에 찔려 죽고, 무솔리니는 정부와 함께 교수형 당하고,바이런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고야는 납 중독으로 죽고, 조셉 길로틴은 자신이 고안한 단두대에 목잘려 죽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아 죽고, 마시마 유키오는 할복 자살하고,이타미 주조는 결백을 주장하려고 스스로 죽음을 청하고, 이사도라 던컨은 스카프가 차 바퀴에 감겨 죽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자결하고, 제 친구는 스물 한 살 나이에 시험 공부하다 뇌출혈로 죽고, 빨치산은 얼어 죽고, 르완다 난민들은 굶어 죽고, 지존파는 처형되어 죽습니다. 죽은은 우리의 주변에 가득차 있습니다.
현실 공간 뿐만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에서도 그렇지요. 소설과 영화, 연극처럼 서사를 다루는 예술 장르는 죽음을 마지막 카드로 활용하길 좋아합니다."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 19~20쪽)
참 멋있지 않은가. 저자 이동진씨는 이 책의 제1장에서 '죽음조차 소유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이라는 제목으로 15개의 영화작품을 소개한다. 파리의 실락원,자연의 아이들,탱고 레슨,접속,아마데우스,조지아,보디가드,위험한 독신녀,더 팬,퍼니 게임,첨밀밀,라이언 일병 구하기, 돈 크라이 마미,트레인포스팅,공포탈출 등이 그 것들이다.
이 책 때문에 '세계영화문화사전'(집문당, 값60,000원)과 '세계영화인명사전'(60,000원)을 거리낌없이 샀다. 이밖에도 '영화음악-현실보다 깊은 소리) '(한다래) '감각의 제국'(민음사) '클라시커 50 영화'(해냄) '전설의 시대'(들녘) 등 30 여 권을 겁없이 사들여 읽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후 영화를 보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또한 영화음악을 즐기게 됐다. 책 한 권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는 경제학으로 치면 수 십 배의 '후방경제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이쯤 되면 출판계와 영화계,음악계에서 감사패를 줘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 같은 사람이 꽤 있다면 말이다. "... 세상에 나쁜 영화는 없었습니다. 깨어 있는 눈과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려 할 때, 세상에 나쁜 영화는 없었습니다. 모든 영화는 다 저마다의 그릇으로 제게 가르침을 쏟아 부었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감히 소개한다.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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