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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의 수은주는 오늘도 섭씨 30도 안팎을 오르내린다. 이 한겨울에도 푹푹 찌는 그곳엔 국제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가 있다. 이 조직의 수장인 사무처장은 신영수(68) 박사다. 신 박사는 모교인 서울대 의대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봉직하다 2009년부터 마닐라에서 국제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재학 시절에도 수재로 꼽힌 그가 개발한 포괄수가제 질병분류법(DRG)은 30여 년 전, 미국 정부의 의료수가제도로 채택됐다.

신영수 박사는 그러나 이 제도를 섣불리 한국에 제안하지 않았다. 국내 실정을 감안해 15년 이상 서울대의대 연구실에서 숱한 밤을 지샌 뒤에야 카드로 내밀었다.  신 박사가 한국의료QA학회에 '포괄수가제 도입과 의료의 길'이라는 논문을 낸 것은 1995년이었다. 필자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말 사이에 꽤 오랫동안 의료 현장과 보건복지부를 취재하면서 그의 신중함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새롭다.   


2012년 2월, 우리는 또다른 국제기구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내놓은 '한국 의료 질 검토 보고서'를 봤다.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전반을 처음으로 깊이있게 분석해 내놓은 것이다. OECD는 이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 했을까.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국민의료비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우리나라 보건의료비의 증가율도, 국민 1인당 진찰횟수도, 입원 환자의 평균 입원 일수도 모두 OECD 국가 평균의 2배가 넘는다. 우리 의료시스템에 빨간불이 켜져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수치다. 만성질환자가 많이 발생하게 마련인 고령화사회를 코앞에 두고 있는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이대로 가다간 자칫 붕괴될 수도 있다는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번 OECD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02~2009년 보건의료비 증가율은 연평균 7.7%로 집계됐다. OECD 국가 평균은 3.6%다. 2009년을 기준으로 우리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의사를 찾아 진찰받는 횟수는 평균 13건이나 된다. OECD 평균은 6.5건이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다니며 진료를 받는 의사쇼핑(doctor shopping)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 입원 환자의 평균 입원 일수는 16.7일인 데 비해, OECD 평균은 8.8일이다.  

이 보고서의
경고 메시지를 키워드로 요약하면 ▷ 포괄수가제 ▷ 1차 의료체계 ▷만성 및 복합 질환자 급증에 대비하는 의료시스템 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가운데 포괄수가제란 입원환자의 특정 질병에 대해 미리 정해놓은 진료비를 내도록 하는 제도다.   예컨대  맹장수술엔 얼마, 백내장수술엔 얼마 하는 식으로 진료비를 매기는 방식이다. 진찰·검사·수술·주사·투약 등 진료행위마다에 진료비를 따로 매기는 행위수가제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OECD는 한국이 행위수가제에 집착한다면 진료과잉이 우려되고,의료시스템 운영에서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포괄수가제는 2013년 종합병원과 대학병원 확대를 목표로 2002년부터 7개 질병군(세부 질병 52개)에 시험 적용됐다. 하지만 이는 제도권에 들어온 게 아니다. 병의원들의 자율에 의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신영수 박사가 한국의 관련학회에 포괄수가제를 내놓은 지도 어언 17년이 지났지만 이 제도는 '여전히 실험 중'이다. 물론 병의원은 공산품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다. 따라서 "(잘못된) 포괄수가제는 의료의 품질을 떨어뜨린다"는 그동안의 의료계 반대논리에는 일리가 있고도 남는다. 의사들의 충정도 충분히 이해된다.하지만 그렇더라도 급변하는 사회변동을 따라잡기엔 발걸음이 너무 더딘 것 같다. 의료관리학,임상경제학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시행 속도를 높이고 적용 범위도 넓혀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동네 의원과 병원, 보건소의 역할도 미래지향적으로,건강하게 바꿔 나가야 한다. OECD가 지적한 '지역 기반 1차 의료체계' 대목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1차 의료체계에는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다. 이들 의료기관은 지역 주민들의 건강증진과 질병 예방에 순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평소 건강주치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한다. 그래야 만성 질환자나 복합 질환자들이 손쉽게 드나들며 건강과 질병을 관리할 수 있다. 보다 더 정밀한 검사나 수술 및 처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환자를
 믿을 만한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에 보내주는 진뢰의뢰 기능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 이들 1차 의료체계가 건강해 져야 한다. 시설,장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투자해 대형병원과 맞서는 형국의 '의료서비스 과열 경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더 나아가 
'주치의 중심의 u헬스 시스템'을 확립해 지역 기반 1차 의료체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개원 의사들은 수익 감소를 이유로 이런 시스템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주치의는 u헬스 시스템과 더불어 환자 건강관리의 종합 지휘자로 거듭날 수 있다.  의사가 건강관리 지휘자로 재탄생하면 어떻게 될까. 천문학적인 사이비 의료비가 정상적 진료비에 포함돼 오히려 의료산업의 파이가 커지고, 의사들도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주치의는 평소 진료(진단, 치료)의 총지휘자가 된다. 특히 만성병의 경우 무거운 질환자는 대형병원으로 이송하되, 환자의 정보는 공유할 수 있다. 평소 환자의 건강관리는 주치의가 하고, 생활건강은 건강관리 회사를 통해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만성 및 복합 질환자 급증에 대비하는 의료시스템의 구축이야말로 시급하다. 고령화사회의 문턱을 훌쩍 뛰어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 할 수 있다.  고령인구가 7%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이상이면 고령사회로 규정한다.  2010년 11.3%였던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2018년이면 14.3%에 달한다. 게다가 베이비부머(1955~1964년생)들이 무더기로 고령인구에 속속 편입될 터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만성 질환자와 복합 질환자의 숫자는 신기록 행진을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의료시스템 측면에서도 미래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 고령사회의 큰 그림에서 의료시스템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현재의 팍팍한 현실에서 이해 당사자들의 고통도 만만치 않음을 안다. 그 때문에 조정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료시스템 자체의 붕괴를 나몰라라 할 순 없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공멸을 막아야 한다. 선택의원제든, 약값차등제든,포괄수가제든 '더불어 살아야 할 공동체'의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경제위기에 대처해야 했다. 그가 추경 예산안을 짜면서 왜 의료시스템 구축에 247억 달러라는 거액을 넣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자. 의료비와 노령인구의 급증에 대응하는 제도의 개선이 제자리 걸음이나 거북이 걸음이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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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