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명 수필/단상 회상2011. 7. 25.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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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할 땐 몸서리치며 고개를 휘젓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다. 

시간이 흐르면 현실과 마주한다. 손을 맞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혀 유쾌하지 않다. 기분이 푹 꺼진다. 마침내 순순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퀴블러 로스는 '임종(죽음) 5단계'로 유명하다. 인간은 죽음을 앞두고 여러 단계의 심경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 부정(disapproval)-분노(anger)-타협(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의 다섯 단계를 거쳐 인간은 마음을 비우고 이 세상에 종말을 고한다. 

이른바 말기 암환자 등 종말환자뿐만 아니다. 큰 시련과 맞닥뜨린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단계를 거쳐 운명에 겸허하게 고개를 숙인다.

보름 동안 줄곧 영화감상에 빠져 들었다가 오랜만에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 오전 6시 출근길에 나선 것은 신문사 석간 시절 이후 매우 드문 일이다. TV 시청을 끝낸 뒤 새벽까지 영화 감상을 하느라 느즈막히 사무실에 나가던 일상을 오늘 확 바꾼 것은 내 인생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퇴직 전에 계획했던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은 탓에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그 때문에 사무실에 나가는 일이 뜸했고, 영화 마니아와 워크홀릭(걷기 중독자)처럼 지냈다. 

오전 6시에 아파트를 나선 것은 일터로 나가는 새벽인파와 마주치지 않으려는 속셈에서다. 조금 더 지나면 졸린 얼굴의 시민들이 지하철을 꽉 메우기 때문이다. 안하던 짓을 한 까닭에,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막 일어난 마누하님에게서 행방을 묻는 메시지가 날아든다. 

오늘 조기 출근은 내 인생이 측은해지지 않도록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퀴블러 로스의 5단계를 이미 다 거친 것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도, 인생에 대한 예의도 중요하긴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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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