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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직장을 그만둘 때 블로그에 작성했던 글을 읽은 몇 사람이 놀려댔다. 오랫 동안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 신분증을 반납하기 전에 비누로 깨끗이 씻은 게 우스꽝스러워 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설령 그렇게 했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쪽팔리게 왜 블로그에 쓸까 하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20년을 훨씬 넘게 다닌 회사에 작별을 고하자니 매우 쓸쓸하고 아쉬워 기록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 옛 추억을 더듬다가 벌써 1년하고도 반이 지난 날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한 줄 썼다.
"오늘 문득 '사회적 친정'에 생각이 미친다. 한 번 친정은 영원한 친정이다. 친정을 떠났어도, 친정이 잘 되고 친정 동생들이 튼튼하게 잘 자라야 마음이 편하다. 전생의 업이 쌓여 현생의 내가 있듯이, 내가 몸담았던 친정이 없다면 오늘의 나는 없다.
어쩌다가 친정에 서운함을 표시할 순 있어도,친정을 싸잡아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인연을 지속하기 싫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정을 그리워한다. 그런 사람 몇몇의 얼굴이 떠오른다. 막걸리 한 잔 하고 싶다."
사실 옛 직장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고생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이들을 키우게 해준 고마운 곳이다. 오늘 문득, 함께 웃고 함께 울던 많은 후배들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겠다.
누구에게나 분신(分身) 같은 존재나 징표가 있게 마련이다. 월급쟁이에겐 신분증이 중요한 분신의 하나다. 신분증이 회사 출입증의 역할을 하거나 출결을 체크하는 데 통상 쓰이기 때문이다. 나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신분증이야말로 개인의 분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제 근무일로 따져 월,화 이틀이 지나면 정든 회사를 영영 떠난다. 나는 회사가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이해하고, 애써 조직에 적응하려고 했다. 한편 회사는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를 예쁘게 감싸준 게 분명하다. 그 덕분에 그 오랜 세월을 '동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금요일 오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퇴직 처리 절차에 따라 신분증과 노트북PC를 반납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트북은, 한 달 간의 말년휴가(연월차 휴가) 내내 '출근'한 마포 사무실에 있다. 양복 바지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회사 신분증을 꺼내 봤다. 이 증이 발급된 게 도대체 언제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때가 꽤 묻어 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고인의 몸을 정성껏 깨끗하게 씻어 드린다. 그런 다음 수의를 입힌다. 서양에선 고인의 얼굴 등 몸 치장까지 한다. 가톨릭 장례의식을 영화 같은데서 보면 고인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눈을 감은 채 관에 누워 있다. 조문객들은 사자(死者)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꽃을 가볍게 놓는다.
고인의 몸을 청결하게 하는 건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의 경우에 한하지 않는다. 화장(火葬)할 때도 그렇게 한다. 그것은 떠나는,아니 돌아가는 고인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다. 땅 속에서 곧 영면에 들어가거나 불구덩이 속에서 몇 줌의 재가 될 터인데도 굳이 고인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인간의 일이다.
신분증은 아마도 1990년대 초반부터 내 분신이었다. 그런 귀중한 신분증을 며칠 뒤 장례 지내야 한다. 내 분신은 반납되면 파쇄기로 부숴지고 이내 쓰레기통에 쳐박힐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에 타 육신을 잃을 게 분명하다. 죽은 사람에 비유하자면 매장이 아니라 화장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욕실로 신분증을 들고 가 깨끗히 씻어줬다. 오랫동안 풍파에 시달려 때가 덕지덕지 묻고 낡은 내 분신을 비누로 정성껏 씻어줬다. 어차피 며칠 후면 소각장의 불덩이 속에서 활활 탄다. 갓난 아이의 한 줌도 안되는 재가 돼 사라진다. 하지만 그냥 보내지는 못하겠다. 분신의 육신을 어루만져 준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마지막으로 건넨다.
"슬퍼하지 말아라. 만물유전(萬物流轉)이라, 모든 것은 흐른단다 ( Panta rhe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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