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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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인십색,각양각색이다. 때문에 삶을 꾸리면서 부러워하는 대상이 사람마다 사뭇 다르게 마련이다. 공부 잘 하고,예쁘고,참한 20대 초반의 여대생이 "빨리 늙고 싶다. 곱게 늙고 싶다"고 말하는 걸 오래 전에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최근엔 40대임에도 몸매가 20대 뺨치는 한 인기 여배우가 "곱게 늙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보도에 빙그레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래,맞다. '9988234'가 되면 얼마나 좋으랴.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3일 만에 죽으면(4) 좀 좋겠는가. 그러려면 운동도 꾸준히 하고, 돈도 구차하지 않을 만큼 모아야 하고,아프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세상사가 뜻대로 되는 건 아닐 게다. 그런 홍복을 안고 태어난 사람은 극히 드물다. 

곱게 늙어가는 것. 그것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런 분들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이래저래 나이 듦이 스스로 느껴지고,옆 사람의 눈에 뜨일 때면 바람이 바뀐다. "그래. 정결하게 살다가 빨리 죽으면 좋겠다."  


지난해 강남의 한 마라톤교실에 등록해 준비운동도 배우고 양재천을 헉헉거리며 뛴 적이 있다. 마라톤 국가대표선수를 지냈다는 우리 코치는 10km코스가 가장 위험하다고 매번 강조했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해, 무턱대고 뛰다가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10km코스가 왜 위험천만한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았다. 중장년에 접어들어서도 마음은 20대인 분들이 하고 많다. 자신의 엔진이 이미 낡았는데도,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환상족이 흔하다. 이런 사람들이 10km를 만만하게 보고 꼭 사고를 치는 것 같다. 

마라톤을 잠시 하면서 나도 그런 축에 낀다는 걸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의 마음,50대의 몸인데 그걸 무시하고 뛰다보면 여기저기 몸 부속품이 처참하게 망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참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다시금 곰곰 생각해 본다.결론은 이렇다.  "그래. 정결하게 살다가 빨리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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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
이모저모/리뷰2010. 6. 1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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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어느 검사장이 퇴임식 때 말해 화제를 뿌렸다.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
 
* 새는 죽게 되면 그 울음소리가 애달프고, 사람은 죽게 되면 그 말이 어질다.
* 새는 마지막 울음이 가장 아름답고, 사람은 죽기 전의 말이 가장 진실하다. 
 
 조지장사 기명야애(鳥之將死 其嗚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증자(曾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온다. 증자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문병 온 맹경자(孟敬子)에게 "새의 죽기 직전의 울음소리는 참 슬프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어떤 악인이라도 어진 말을 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삼국지에선 유비가 유서에 똑같은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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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
이모저모/리뷰2010. 6. 1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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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특히 퇴직 후에 함께 호흡할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후엔 돈,건강,친구 등 3가지가 중요하다. 
친구관리 테크닉, 즉 '우(友)테크 10훈(訓)'을 정리한다.

1. 일일이 따지지 마라.
2. 이 말 저 말 옮기지 마라 
3. 삼삼오오 모여 살아라 
4. 사생결단 내지 마라.
5. 오! 예스 하고 받아 들여라 
6. 육체 접촉을 자주 해라.
7. 7할만 이루면 만족해라
8. 팔팔하게 움직여라
9. 구구한 변명을 늫어놓지 마라 
10. 10%는 베풀면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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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
이모저모/이슈_생활2010. 3. 1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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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다비(茶毘)는 무소유의 극치다. 법정스님의 다비와 관련한 유언은 말할 나위 없다. 사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으니, 현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시겠다는 마지막 결단이다. 다비(화장,火葬)로 남은 뼈를 부숴(쇄골,碎骨해) 자연 속에 뿌리면(산골,散骨하면)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했다고 할 일이다. 산골한 곳을 알리지 않겠다는 것 또한 무소유의 뜻에 딱 들어맞는 조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죽음을 두려워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뭔가 남기고 떠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맞이하는데도 끝까지 무덤이나 분골함을 챙기는 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윤회의 사슬(生과 死의 결박)을 끊지 못하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승의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가는 게 마땅하다. 분골을 이름모를 나무와 꽃에 자양분으로 주고 떠나야 비로소 무소유를 실천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법정스님은 평소 가르쳤던 '무소유'를 완성하고 떠나신 셈이다. 
 
수행하는 스님을 일컬어 운수납자(雲水納子)라고 한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며 스승을 찾아, 선지식을 참구함을 이른다. 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三人行 必有我師)고 한다. 그래서 고행하는 스님들에겐 매일 아침 양치질할 절이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법정스님이 입적했다. 고인은 생전에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셨고, 중생에게 이를 권장하셨다. 하지만 무소유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허명을 얻었고, 인지세를 받았고, 오두막집과 자연 그리고 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내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소유를 나름대로 완성했다. 고인은 "장례식을 하지 마라.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장례준비위원회는 마지막 가는 법정스님의 유지를 반 쪽만 받들기로 했다. 굳이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치렀다. 유언을 존중하는 게 살아 남은 자들의 예의일 텐데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옛적에 법정스님의 수상집 ' 버리고 떠나기'(1993년 초판 발행)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 당시 나의 상념은 "무소유의 삶을 산다면서 왜 강원도 오두막집과 자연, 그리고 책에 그리 집착할까"라는 데 머물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비쳤다. 때문에 속진(俗塵)을 떠난 운수납자(雲水納子)도 완전히 방하착(放下着)하기는 불가능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무릇 수행자라 하면,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법이거늘 한 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도 의문이었다. 아침 신문을 보면서야 비로소 고인이 '무소유'의 단계에 들어 섰음을 알았다. 고인이 누리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영예와 같은 것은 사실 '삶의 때'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잡것들을 모두 떨치고 법랍 55세로 입적하셨으니, 진정으로 숙연하게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겠다. 그 분이 풀어놓고 가신 마지막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은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  법정스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문득 성철스님의 열반송이 떠오른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라

둥근 수레바퀴 붉은 해를 토하며 산에 걸렸네.

 

生 年 欺 誑 男 女 群

彌 天 罪 業 過 須 彌

活 陷 阿 鼻 恨 萬 端

一 輪 吐 紅 掛 碧 山





법정스님은 결국 '생과 사의 결박'을 끊지 못하고 떠나신 것 같다. 고인도 그 점을 아신 모양이다.  "~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 다시 말해 두 번 다시 속세에 태어나지 않는 게 열반이다. 비록 부처님처럼 열반에 들지는 못하셨지만, 부디 다음 생에서는 현생의 고통을 받지 않고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시길 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법정스님이 가시는 것을 보고,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시는 원공스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6년 동안 면벽수행하신 분이다. 천축사 무문관은 계룡산 갑사 대자암 조실이신 정영스님이 만든 참선 도량이다. 1966~1971년과 1972~1977년 두 차례의 면벽수행을 끝으로 사라졌다. 6년 간 작은 구멍을 통해 소량의 공양과 배설문 정도만 들어오고 나갈 뿐인, 무문관에 스스로 갇혀 참선에 매진한 스님들은 썩 많지 않다. 직지사 조실을 지내셨고 2004년 입적한 관응스님, 범어사 주지를 다섯 차례나 지냈고 1989년 입적한 지효스님이 무문관 6년 수행을 하신 분들이다. 제선스님(선사)은 무문관 수행 후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자취를 알 수 있는 생존인물은 구암스님(하남 광덕사 주지),그리고  천축사 주석을 지내셨고 무문관을 나오신 뒤 30년 간 '걷기 수행'을 하신  원공스님 밖에 없다.  
 
오늘 오후, 사무치게 그리운 원공스님과 쉽지 않게 통화했다. 원공스님은 평생 옷 두 벌로 사신 분이다. 그야말로 '무소유'의 상징이다. 고행을 하시는 많은 스님들도 세속적 기준에 따르면 '무소유'를 실천하신다. 하지만 원공스님 같은 경지에 이른 분은 썩 많지 않다. 스님은 수녀님들과도 곧잘 농을 주고 받으시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로 즐겁게 해주신다. 어려운 불경 이야기는 거의 하시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양치질할 사찰도 없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다. 이 땅의 모든 자연이 스님의 품 속에 안기고, 스님이 자연의 품에 안긴다. '무소유'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원공스님이 사뭇 그리운 까닭이다.  떠나신 법정스님도 원공스님을 익히 아셨을 터다. 원공스님처럼,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6년이나 면벽수행을 한 데 이어, 30년 간 우리 강산을 떠돌며 걷기로 행공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법정스님의 입적이 많을 것을 생각케 한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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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