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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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감독 게리 마샬 (1990 / 미국)
출연 리처드 기어,줄리아 로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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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창녀였다.
뭇남성에게 몸을 파는,허드렛 여자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팔기 시작했다.그리고 보석이 됐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줄리아 로버츠의 이야기가 아니다.

러시아 여제(女帝,여 차르) 예카테리나 1세.
루터교 목사의 하녀라는 천한 신분으로 자란 그녀는 
군인들에게 몸을 팔았다.특히 장군들의 침대를 옮겨다니며
성욕의 노리갯감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줄리아 로버츠의 경우처럼 기회가 왔다.
러시아의 '강한 남자'표트르 대제(大帝)의 눈에 띈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그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몸만 팔지 않았다.마음을 팔기 시작했다.
전선의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불안해 하는 표트르  대제를
야전침대에서 정성껏 모셨다.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가 경련을 일으킬 때나, 멜랑꼬리한 기분이 될 때나
그녀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표트르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표트르가 죽자 정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여제의 위(位)에 올랐다. 자신의 딸 옐리자베타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그녀의 딸은 표트르의 손자(3세)를 후계자로 삼고,무능한 그에게 똑똑한 소피아를 묶어주었다. 소피아는 예카테리나 2세가 돼, 제정 러시아를 거머쥐었다. 

이 땅에도 우리의 '불쌍한 여동생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마음과 몸을 속히 정화(purification)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으면 한다. 그들도 예카테리나,줄리아 로버츠(배역)처럼  '인생 2막'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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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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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재산 1조 5천억여원(13억 달러)로 올해 포브스지가 뽑은 '미국 400대 부자'리스트(215위)에 오른 오프라 윈프리가 '차차기(次次期)미국 대통령감'1위에 선정됐다.
이는 미국 연예주간지 '인터치'의 조사 결과다.
물론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스타 10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하지만 현대 대중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대중문화의 힘이 막강하다는 데 대해선 반론도 만만치 않다.이번 대선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브래드 피트,로버트 드 니로 등 헐리우드 스타들이 케리 후보를 지원했지만,그가 결국 미역국을 먹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미디어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의 최대 강점으로는 여성과 아동의 권익 신장에 앞장선 게 꼽혔다. 그는 아프리카 에이즈 아동환자 등을 도왔고,넬슨 만델라 등 유명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차차기 미국 대통령감'의 2위는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널드 슈워제네거(영화배우,캘리포니아주 주지사),3위 벤 애플렉(영화배우), 4위 P.디디(가수),5위 엘렌 드제너스(방송인),6위 드류 베리모어(영화배우),7위 도널드 트럼프(부동산 재벌),8위 마틴 신(영화배우),9위 윌 스미스(영화배우),10위는 마돈나(가수)였다.
케리 대통령 후보 지지활동을 편 미남배우 벤 애플릭은 여성표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언론 매체에 종종 등장하는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쫄딱 망했다가 억만장자의 대열에 낀 것으로 미뤄,미국의 재정적자 문제를 술술 풀어갈 것이라는 평을 들었다. 마틴 신은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에서 5년 간 대통령 역을 맡았고,TV영화 '웨스트 윙'에서 케네디 대통령 역을 잘 소화했다. 또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선 베트남 전쟁영웅 역에 캐스팅됐다.    

이번 조사에서 1위에 오른 윈프리는 19세 때 '미스 블랙 테네시'에 당선,ABC방송의 내슈빌 지역 채널에서 뉴스 앵커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방송국으로 옮긴 그는 인기 없던 프로그램을 톱 프로로 떠올렸다. 1986년 부터 시작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110개국에서 방송됐고, 미국 내 시청자만도 2,300만 명에 달한다. 
1985년 골든글로브상을 받은 그는 최근 쇼에서 "한국 여성들은 서구적 미모에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한국은 성형수술의 천국"이라고 말했다.한인사회의 반발이 거셌음은 물론이다.<주 자료 출처:일간스포츠 11월 8일자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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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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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글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제자인 플라톤의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마추어 민주주의가 군중독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잠시 조각가로 일하다 소피스트가 된 그는 말장난으로 돈벌이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정치의 도덕적 근거를 밝혀내는 데 심혈을 쏟았다. 아테네의 엘리트 청년들에게 독자적인 사고 방식을 가르쳤다. 그들을 훌륭한 정치가로 키우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때문에 돈벌이가 거의 없었다. 집에서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누라가 바가지를 득득 긁는 건 당연하다. 그는 마누라 크산티페에게 역사적인 악처의 오명을 씌웠다. 크산티페의 욕설과 항의에 맞서 소크라테스가 변증법을 더욱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해석은 우스갯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반어)'라는 방법을 통해 상대방을 무력화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던 그는 어느날 고소를 당한다. 죄목은 청소년 타락,고풍(古風)거역을 사주한 혐의였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법정 변론에 나섰다. 하지만 재판부는 과반수 찬성투표로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그는 아테네의 법에 따라 형량을 스스로 매기도록 허용된다.
하지만 그는 이에 불복했다.재판부를 향해 오히려 화살을 쏘았다. 죄가 없는 사람을 법정에 세웠으니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재판부를 성토한 것이다. 
이러니 무사하겠는가. 법정모독죄까지 뒤짚어쓴 그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제자들은 탈주를 도와주겠다고 했으나,그는 거절했다. 폴리스 밖에서 살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미국이나 스위스 등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가(一家)를 이룬 그가 철학자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곤 없었다.

사마천은 흉노족에 투항한 이릉(한 무제의 손윗 처남)을 비난한 죄로, 세 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허리를 잘리고 죽거나,금전 50만 전을 내고 풀려 나거나,궁형(거세의 형벌)을 당해야 했다.사마천은 결국 '사기'를 남기기 위해 궁형을 택했다.누가 사마천을 준법의 화신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는 법정투쟁을 벌였고,형량의 자기 선택권까지 거부하며 보상을 요구하다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죽음을 택했다.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그에겐 죽음보다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비교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 학자는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가, 속물적인 군중(mob)이 내세우는 명분의 희생양이 됐다고 분석한다. 속된 떼거리들이 정통적 가르침이라는 명분을 그럴 듯하게 내세워 행하는 폭력적인 정치,즉 우민정치(愚民政治,mobocracy)야말로 소크라테스가 경멸하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준법 교육을 위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독배를 마시고 죽어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사례로 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며 교육인적자원부에 교과서의 수정,보완을 요청했다. 
헌법재판소는 "소크라테스 사례는 권위주의 정권의 논리"라며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소크라테스의 사례가 등장하는 것은 기본권의 양보를 요구하고, 헌법과 기본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법률의 목적과 내용이 정당해야 한다는 '실질적 법치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우리 헌법 체계와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헌재는 "앞으로 소크라테스 일화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법률의 형식만을 중시하는 '형식적 법치주의'의 비교 토론을 위한 자료로 소개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저항권 행사와 그가 처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을 가볍게 여겨선 안된다. 그가 독배를 마신 건 준법정신이 아니라,일종의 순교이며 차원 높은 체념이라 볼 수 있다.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셨다는 것을 준법정신의 표본으로 여기는 '정통적,교과서적' 가르침은 이제 교과서에서 걷어내야 마땅하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어록을 남긴 적이 결코 없다.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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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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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면서 매우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병역 기피,병역 비리 등의 역겨운 말이 터져 나올 때다.
'꼬마 아빠'의 숙명을 지고 사는 나는, 예비역 육군 병장이다.
대학 3학년 때 휴학을 한 뒤, 순천에서 병영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당시 몸무게나 키나 현역 입대 하한선을 약간 웃도는 꼬마 군인이었다.
논산훈련소 시절은 배고프고,힘든 나날이었다.어릴 때 "꼭꼭 씹으면 단맛을 내는 녹말이 나온다"(침이 녹말을 맥아당으로 분해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했다.그러다 보니 밥을 야무지게 씹는 게 습관이 됐다. 다른 훈련생들처럼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 밥을 후다닥 먹어 치울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식판에 밥을 타, 서너 술 떠먹다 보면 "식사 끝!"이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논산훈련소에선 역사적으로 23연대,26연대,30연대가 악명 높았다. 군기가 가장 센 연대로 통했다.나는 23연대에서 맹훈련을 받고 눈물을 몇 차례 흩뿌려야 했다. 뺑뺑이를 엄청 돌린 뒤 "피와 땀이 스며있는 이 고지 저 고지에 쏟아지는 별빛은 어머님의 고운 눈길..."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면 여기저기서 목메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훈련 기간은 여름이었다.그런데 물이 모자라 몸을 제대로 씻기가 어려웠다. 조교들은 우리 발가벗은 훈련병들을 화장실에 몰아넣고 호스로 공중에 물을 뿌려댔다. 훈련병들은 물 한방울이라도 더 묻히기 위해 혈안이 됐다. 몇 줄기 물에 몸을 적시는가 하면 이내 샤워시간이 끝나곤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침상 옆 자리의 동료가 나를 불렀다. 그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방위산업체의 막내 아들이었다. 국립대에서 체육을 전공하다 온 그는 '특별 관리 대상자'였다. 그가 말했다.
"야,너 내일 화장실 청소 희망자 손들라코 하먼 손 번쩍 들거레이."
어이가 없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화장실 청소를 허게 되먼 장갑 끼고 똥을 닦아내야 한다. 고것만 참으면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있데이."
그의 말에 따랐다.이후 변기 속에 손을 넣어 똥을 치우며 구토증을 느끼기도 했지만,청소를 마친 뒤 둘이 발가벗고 깨끗하게 몸을 닦을 수 있어 참 좋았다.
이후 육군포병학교를 거쳐 최전방 사단에 배치됐다.꼭두새벽의 구보와 한겨울의 태권도 훈련,영하 20도 안팎의 꽁꽁 얼어붙는 날씨에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단체 기합 받기,한 겨울 군복을 입고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 나무에 매달려 "맴~ 맴~" 외치기.....
이런 강훈련은 나를  '강한 남자'로 만들어 주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온 힘과 온 정신을 모아 살아야 했던 대학 복학 시절에 발휘한 강인함은 군대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포상(견인포의 집)을 지을 때 몇 개월에 걸쳐 '등짐 노가다'를 하고,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렸다. 눈 치우기 작업,철책선 설치 작업 등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지식은 머리에서 많이 새나가고 있었다. 하나라도 잊지 않기 위해 김장 등 작업을 할 때 한국외국어대에 다니다 온 동기(현재 모 대학 교수) 와 영어단어를 서로 물어보는 게임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눈물겨운 노력이다.

이런 '강한 남자'되기 프로그램은 내 삶에 큰 도움이 됐다.개구리복을 입고 군문을 나설 때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사나이가 되는 길-군 복무.
이를 기피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지고,가슴이 아프다.(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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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Z
종명 수필/단상 회상2010. 7. 1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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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는 알크메네와 간통해 헤라클레스를 태어나게 했다.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리온은 헤라클레스의 양아버지가 되었다. 헤라클레스는 열 두가지의 과업을 풀었다.30년 동안 청소하지 않아 지저분하기로 유명한 아우게이아스의 마구간을 단 하룻 만에 깨끗이 치웠다.지하세계의 수문장인 무서운 개 캐르베로스를 생포했다.또 머리가 숱하게 많이 달린 히드라를 처치했고,네메아 숲의 사자를 목졸라 죽였다.마지막으로 헤라클레스는 헤스페리데스의 딸들이 지키는 정원에서 황금사과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나자렛 예수의 어머니는 처녀였다. 그의 부친은 요셉이 아니라 신이다. 요셉은 이를 믿은 대가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거룩하다는 평을 들었다. 요셉의 운명은 그리스신화의 암피트리온과 비슷하다. 예수는 성전의 환전상들을 몰아낸다. 헤라클레스의 마구간 청소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예수는 앉은뱅이를 고치고, 죽은 라자로를 되살린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술이 떨어지자 즉각 공급한다. 폭풍을 잠재우고,미친 사람들의 몸 속에 맴돌던 귀신들을 쫓아내 돼지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한 뒤 일제히 자살하게 한다.물 위를 유유히 걷기도 한다. 예수는 “전쟁 대신에 사랑을 하라”고 설파한다.이는 후세 히피들의 삶의 모토가 된다.


예언자 나사렛 예수의 등장(기원전 7년에 출생,서기 30년 경 사망)은 이스라엘의 신과 국민의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그것은 신과의 관계를 사육제 축제처럼 만들었다. 축제는 항상 '뒤짚어짐'을 뜻한다. 거기에서는 바보가 왕이 되고, 왕이 격하된다. 그리스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은 지극히 가난한 가정의 아이 모습으로 태어난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관에 들어갈 돈조차 없어 사실상 노숙자로서 마구간의 소와 당나귀 사이에서 신은 태어난다.('Die Bildung 교양'에서 발췌 및 재구성, 디트리히 슈바니츠 저)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바짝 다가왔다.

연말에 할 일이 태산 같아,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메리 크리스마스'와 '미리 크리스마스'.

조어(造語)가 애교스럽고 그럴 듯하다.

지방 근무를 하던 2년 동안,11월 중순만 되면 큰 플라스틱 통에 소나무를 심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객지의 외로움을 달랬던 일이 기억난다. 쓸쓸한 연말을 훈훈하게 만들고자 애썼으나,뻥 뚫린 가슴엔 찬바람만 가득찼다. 크리스마스는 가진 게 없는 사람들도 왕이 되는 축제의 날이다.'미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만든 분도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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